나의 이야기

아픈동생

어울령 2009. 9. 17. 11:52

생각만해도 맘이 아픈 동생이다.

시인이 되었다고 시집을 보내왔다.

놀랍고 기뻐서 시집을 펼쳤는데 져린가슴 더 져리게 만들었던 동생이 재혼하겠다고 연락이 왔다.

 

2001년 교통사고 휴우증으로 강남성모병원을 오가며 서울에서 많은시간 머무룰 수 있었기에,

동생부부에게 뭔가모를 문제가 있다는 것을 눈치로 알게됏다.

지금생각하면 그때 몰랐어야 했는데...

 

동생남편은 동생의 도움으로 서룰대 식품공학과를 졸업할 수 있었다.

내동생이지만 참 대단한 동생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동생은 자기사랑을위해 서울서 가정부로 일했단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사회나갔지만 전공했던 아동심리학으론 쉽게 취업이 힘들었던게다.

차마 집에는 말을 못하고 서울엔 있어야 했기에...

중곡동에서 그냥 살았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어렸다,

지하에서 세들어 살고 있을 때 대학을 졸업한 동생들이 서울로 올라왔다.

그당시 나는 기독교로 개종한 친정집에선 배교자다.

신실한 불교집안에서 부처가르침으로 자란 우리가족에겐 청천병력같은 소식이었다.

껄그러운 사이가된 자매들 사이에 가족이란 그리움보단 껄끄러운 묘한 감정들이 흘렀다.

당시 우성건설 다니던 남편은 청주로 발령받아 가면서도 동생들과 함께 살라고 혼자만 갔다.

처제들이 거처할곳이 마땅하지 않아 배려해준 덕분이었지만 그리 오래 가지못했다.

나는 찬양을, 동생들은 듣기싫어 향을 피우고 불경을 틀어놨는데,

전쟁이었다.

지금은 믿음이 조금 성장하여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었는데...

주말이면 집에오는 남편이 심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남편도 나를 따라 교회에 나가면서 달라져 가고 있을 때였기에 향내를 무척싫어했다.

두어달 지나서 결국 남편은 폭팔했고 동생들은 반발했다.

친정엄마는 동생들에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며 일축으로 사위손을 들어 주셨지만

냉냉해진 우리들은 동거가 불편하게 되었다.

결국 청주로 가게되면서 간호사인 동생은 병원기숙사로 직장이 없던 동생은 취업했다는게 가정부였던거다.

 

아기보기 가정부로 남자친구 졸업시키고 집을 장만할 기반 마련하고 결혼했다.

풀무원에 입사하고 아무기반 없는 동생남편을 형부가 보증인이 되줌으로 시작한 삶이 파탄나도록 바라만 봤다.

여자문제라고 직감하고 동생에게 돌려서 몇번이고 물었지만 아니랬다.

문제가 발생했을때 여자문제가 아니라고 믿는 동생에게 그럼 아이도 주고 오라고 했다.

반드시 돌아온다고... 

난 참으로 어리섞었다. 느낌으로 알았으면 무조껀 참고 또 참으라고 했어야는데....

이혼하고도 뻔뻔하게 인보증서류를 새로 받은 야비함이 어디서 나오는걸까?

합의이혼서류 도장찍고 바로 동거에 들어갔다는 소릴들었을 때 동생이 받은 충격은 너무도 컸었다.

중소기업의 딸이라고 했다. 동생도 들어서 알고있던 이혼한 여자였다.

딸 유나가 스트레스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있단 소릴 듣고 통곡하던 소리가,

아들 진우가 보고싶다고 울부짖던 동생이,

유방암으로 수술대 위에서 하나님을 영접했고 살았다.

그아픈 세월에 흔적이 시에 고스란히 배어나왔다.

 

이제 재혼하고 싶단다.

동생을 평안하게 안아 줄 수 있음 좋겠다.

동생의 시에서 맑고 밝은 노래가 나왔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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