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상식

상사병에 대한 오해와 진실

어울령 2010. 8. 8. 17:01

 

춘추전국시대의 송(宋)나라 말기 강왕(康王)은 주색에 탐닉하여 술로 밤을 새우고 여자를 많이 거느리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으며 이를 만류하거나 지적하는 신하는 사형에 처했다. 강왕의 시종 한빙(韓憑)에게는 절세미인인 부인 하 씨가 있었는데, 우연히 하 씨를 보게 된 강왕은 강제로 그녀를 후궁으로 삼았으며 한빙에게 없는 죄를 씌워 성단(城旦:변방 지역에서 낮에는 변방을 지키고 밤에는 성을 쌓는 형벌)의 벌을 내렸다.
얼마 후 한빙은 아내를 너무 그리워한 나머지 자살하였고, 이 소식을 들은 아내 하 씨도 성 위에서 투신하였는데, 자신의 옷소매에 “임금은 사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지만 저는 죽는 것을 다행으로 여깁니다. 제 시신을 남편과 합장해 주십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 유언에 화가 난 강왕은 의도적으로 무덤을 서로 떨어지게 하였다. 그러자 그날 밤부터 두 무덤에서 각각 나무 한 그루씩이 자라기 시작하더니 10일 후에는 큰 아름드리 나무가 되었고 서로 뿌리가 얽히고 가지가 맞닿았다. 그리고 나무 위에서는 한 쌍의 원앙새가 서로 목을 안고 슬피 울었다. 이것을 본 사람들은 원앙새를 죽은 부부의 넋이라고 여겼고, 이에 그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불렀으며, 이때부터 ‘상사병’이라는 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최근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 <황진이>에서 황진이를 사모하던 이웃집 도령이 상사병으로 죽는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상사병으로 죽을 수 있는지 묻는 사람들을 종종 접하게 된다. 황진이에 대한 이야기에서 뿐 아니라 문학작품에서도 종종 상사병으로 죽어가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괴테의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는 약혼자가 있는 로테를 사랑하여 괴로워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고, 에밀리 브론테의 소설 <폭풍의 언덕>에서는 어린 시절부터 캐서린을 사랑해 온 히스클리프가 캐서린이 사망한 후 점차 피폐해져가다가 그녀의 환영을 쫓으며 죽어 간다
더 많이 기뻐하고 더 많이 행복해도 모자란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어디 세상이라는 것이 다 그럴까. 사랑도 마치 동전의 앞뒤처럼 알송달송 하기만 하다. 행복과 기쁨이라는 반대쪽에는 아픔과 슬픔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아픔이 크면 상사병이 된다. 앞에서도 살펴봤듯이 사랑의 아픔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국경을 뛰어넘어 존재하는 모양이다. 다만, 지난날에는 ‘서로를 그리워하지만 맺어지지 못한 사랑의 괴로움’을 상사병이라고 했다면, 근래에는 그 의미가 다소 변하여 ‘괴롭고 견디기 힘든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변질되었을 정도다. 이처럼 사랑은 흔히 ‘열병’이라 불리기도 한다. 서로 사랑하나 이루어지지 못하는 괴로움 혹은 혼자서 하는 사랑의 괴로움은 이런 열(火)병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니 얼마나 답답하고 힘들겠는가.
이런 괴로움이 해소되지 않은 채 오래 지속되어 우울증이 생기거나 괴로움이 너무 강렬해 순간적으로 충동이 잘 억제가 되지 않으면 삶이 부정적으로 여겨져 죽음을 택할 수도 있다. 상사병의 무서움은 바로 이런 극렬한 행동으로 사람을 내몰 수도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사랑에 대해서 두려워하거나 망설일 필요는 조금도 없다. 아픔만큼 성숙한다는 말은 결코 유행가 가사가 아니다. 사랑의 아픔은 대체적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되는데, 이는 그런 아픔을 통해 자신을 반성하고 그 반성을 통해 더 큰 사랑을 준비하려는 인간의 본능이 우리 내면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비록 짝사랑이라고 할지라도 사랑하고 또 사랑할 일이다. 다만 나를 사랑하는 마음만은 버리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아픔으로 나를 키우지 못하고 그 아픔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그러니 남을 사랑할 때처럼, 아니 그 보다 더 많이 나를 사랑하는 일을 게을리 말아야 할 것이다.

사랑으로 아픈 병, 상사병은 홍역처럼 한 번쯤은 인생을 스쳐간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은 분명 아름다운 일이다.
도움말 : 가톨릭의과대학 성빈센트병원 정신과 신윤경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