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글입니다. 끝까지 읽어주세요...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 중에 기억에 남는 말씀이 있다. 책을 읽어야 하는데 책 중에서도 전기를 많이 읽으라고 하신 말씀이다. 전기를 읽으면 인생을 한번 더 사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전기를 읽는 목적은 무엇인가?
이는 독서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책을 읽어 왔다](청어람미디어)의 다치바나 다카시는 독서의 목적을 둘로 구분하였다.
1) 목적으로서의 독서
2) 수단으로서의 독서.
책 읽기 자체를 즐기는 것이 전자라면, 책에서 정보를 캐내려는 읽기는 후자에 속한다. 우리는 그저 책이 좋아서 읽기도 하지만 책 속에 함축된 인류의 지식과 지혜를 구하기 위해서 읽는다.
그러나 독서는 한 가지 더 다른 목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변화다.
책을 통해 한 인격과 새로운 생각과 삶을 만난다. 이 만남을 통해 책을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같을 수가 없다. 독서는 책을 즐기면서 정보와 지식을 얻고 결국 자신을 변화시킨다.
전기 읽기의 목적도 동일하다. 전기는 우선 재미있고 공부가 되고 읽는 나를 변화시킨다.
변화는 독서의 최종 목적이다. 전기는 이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해결하는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전기는 재미가 가득하다.
사실 성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빈, 조나단 에드워즈나 칼 바르트 등의 신학에 접근하려고 시도해 보면 우선 절망감에 사로잡히기부터 한다. 그들이 쌓아놓은 크고 웅장한 지적 성채 앞에 아둔한 머리를 탓하며 책을 덮어버리기 일쑤다. 어렵기 때문이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 배경, 고뇌했던 주제, 투쟁했던 반대자들, 독특한 전문 용어 등등을 파악하기란 만만치 않다. 내용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자료도 방대해서 어디서 어떻게 읽어야 할지 막막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전기는 쉽고 재미가 있다. 루터의 로마서 주석은 따분할 수 있지만 롤란드 베인튼의 「마르틴 루터의 생애」(생명의 말씀사)는 그 자체가 하나의 고전이며, 루터가 펄떡펄떡 살아 움직이는 생명의 박동과 시대의 역동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위대한 작품들, 곧 「종교적 감정론」이나 「의지의 자유」(부흥과개혁사)는 도전해 볼 만한 작품이지만, 지레 겁먹은 우리로서는 조지 마즈던의 「조나단 에드워즈와 그의 시대」(복있는사람)가 에드워즈라는 성채의 문을 열어준다. 어렵지도 않고, 분량도 가볍고 읽기 딱 좋다.
전기는 모든 공부의 입문서이자 출발점이다. 특히 신앙 전기는 역사와 신학 공부에 최상이다. 간접적인 성경 공부도 된다.
어거스틴이나 루터, 칼빈의 전기는 성경을 보는 시각을 열어주고,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보게 해 주고, 신학적 안목도 길러준다. 루터의 전기를 읽으면, 중세 시대의 낯선 여러 풍경이 친숙하게 다가온다. 독일을 둘러싼 중세 후기 시대사도 배운다. 로마서의 중요성과 시각도 알게 된다. 교황과 가톨릭 체제를 파악하는 데 유용하다.
앞으로는 어거스틴을, 뒤로는 칼빈을, 옆으로는 멜랑히톤과 츠빙글리를, 반대편에는 아나뱁티스트를 덤으로 눈 동냥 한다. 신앙 위인들의 일화와 가정, 교회, 사회적 실천과 사상을 두루두루 살피면서 건질 게 많다.
또한 전기를 통해 우리는 인생의 멘토를 발견한다.
유_불_선 문화에서 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고, 어떤 그리스도인이어야 하는지를 찬찬히 짚어준다.
임어당의 「이교도에서 기독교도로」(신아사)와 「우찌무라 간조의 회심기」(홍성사)에는 동북아시아의 다원적 상황에서 왜 유일한 하나님을 신앙해야 하는지가 다른 어떤 논설보다도 알차게 담겨있다.
또한 하나님과 민족을 동시에 사랑하는 길을 일러준다. 전쟁과 폭력의 광기로 뒤틀린 이 땅에서 비폭력적 평화의 삶을 사셨던 예수의 삶을 뒤따르는 모델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바다출판사)에서 마틴 루터 킹을 통해 만날 수 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정치가가 되어 하나님의 양심, 한국의 양심이 되고자 하는 이의 멘토는 단연 윌버포스이다.
「부패한 사회를 개혁한 양심」(두란노)과
「윌리엄 윌버포스, 세상을 바꾼 그리스도인」(좋은씨앗)은 그리스도인 정치가의 길을 알려준다.
하나님을 추구하는 삶에서 신비와 지식, 기도와 말씀을 겸비한 사역자가 되기를 갈망한다면, 단연코 제임스 스나이더의 「A. W. 토저」(두란노)가 최상이다.
그 외에도 최고의 설교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스펄전의 전기를 찾아야 한다. 신학자이면서도 목회자이기를 꿈꾼다면 에드워즈의 전기를 피할 수 없다.
전기에서 우리는 이렇게 멘토를 만난다. 이것이 전기를 읽어야 할 두 번째 이유다.
자서전이 되다
전기를 읽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전기를 깊이, 반복해서 천천히 읽으면 어느덧 전기의 주인공을 닮아가면서 결국 나 자신이 전기가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독서의 궁극인 변화와 상통한다.
전기는 다른 독서에 비해 흥미롭고, 설교 예화나 채취할 정보가 무궁무진하다. 전기 읽기의 최고봉은 전기의 인물에게서 정서적 감동과 지적인 통찰을 넘어서 그들을 닮는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그들처럼 변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전기의 능력이고, 전기 읽기의 효과다.
장기려 선생은 전기를 읽어 전기가 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선생은 평생 성경을 사랑했고 지속적으로 읽었지만, 특별히 요한일서를 사랑했다(「장기려, 그 사람」, 홍성사). 쓰신 글 중에도 요한일서가 꽤나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어찌하든지 요한일서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하고자 무던 애를 썼다. 그리하여 요한일서의 삶을 살았다.
요한 사상의 핵심은 사랑이다. 요한일서는 하나님을 사랑으로 정의하고 풀이한다.
“하나님은 사랑이다”(요일 4:8, 16). 이 사랑은 개인을 향해서는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사랑으로 표현되고, 교회를 향해서는 사랑의 공동체를 만들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나고, 사회를 향해서는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으로 살아가는 대안 사회를 형성한다.
무엇보다 그 사랑의 강력한 특징은 항상 가시적이고 물질적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가시적이라 함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말(요일 4:20-21)이고, 물질적 형태라 함은, 곤궁한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 구체적으로 경제적인 나눔을 실천하는 것이다(요일 3:17).
그 사랑으로 병원비 없는 이도 가리지 않고 치료해 주고, 거지에게 수표를 아까워하지 않고 주고, 집에 찾아온 거지와 밥상을 같이하기 예사로 한다. 이야말로 요한일서의 사랑의 온전한 실현이다.
요한 공동체는 세상에서 심하게 핍박을 받고 추방당한 소수의 무리로, 제도적인 위계질서가 아니라 오직 사랑으로 구축된 천상의 질서를 꿈꾼다.
서로 사랑으로 내부 분열과 갈등을 극복하고, 세상과 분연히 맞선다. 그가 보기에 현실 교회는 그러지 못했다. 사랑 없이 이권 다툼에 몰두하는 기성 교회가 장기려로 하여금 더욱 요한일서를 묵상하게 만들었을 테고, 그럴수록 급진적인 사랑의 실천을 수행하는 공동체를 탐하게 되었을 것이다.
결국 종들의 모임에 안착한 것이 요한일서의 정확한 해석과 적용인지는 별개로 하더라도 요한일서의 흔적임에 틀림없다.
장기려, 그 사람은 요한일서를 읽어 요한일서가 되었다. 우리는 장기려를 읽어 장기려가 된다.
내가 읽는 전기가 내 삶이 된다. 전기 읽기를 통해 내가 그가 되고, 그가 내가 된다.
읽으면 좋아하게 되고, 어느덧 닮게 되어 그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생각하는 것이 어리고, 말하는 것이 미숙하고, 행동은 철부지 같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고 본받으면서 생각이 자라고, 말하는 것이 성숙하고, 행동은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고 장성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전기 읽기의 최종 목표는 영웅화나 우상화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들 역시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에 불과하다.
또한 내가 그와 같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다르게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가 그일 수 없고, 그가 나일 수 없다. 어설픈 흉내에서 철저한 모방 단계를 거쳐 그와 다른 내가 만들어진다.
전기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모습이 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일 뿐 목표가 아니다.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야기를 지금 여기서 살기 위한 교사요 코치요 증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전기 읽기에 머무르지 말고 자신만의 전기를 쓰는 데로 나아가야 한다.
자서전을 쓰다
우리는 나만의 전기(내 이름으로 된 책이자, 내가 나를 쓴 자서전)를 쓰기 위해서 전기를 읽어야 한다.
왜 그리스도인이 자서전을 써야 하는가.
여기서 우리는 두려움을 느낀다. 써야 할 이유보다는 쓰지 말아야 할 이유가 더 많기 때문이다.
자서전 쓰기를 가로막는 장애물의 하나는 자기 비하이다. “나 같은 사람의 이야기에 누가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공연히 비웃음만 살 텐데......”
그러나 이 말은 적어도 하나님을 포함하기 전에 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나를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러니 곧 내 삶에 대한 판단은 하나님에 대한 평가이다.
나를 비하하는 것은 ....
“누가 나 같은 사람을 창조한 하나님에게 관심을 갖는단 말인가?” 또는
“누가 나 같은 사람을 만든 그런 하나님에게 관심을 두겠는가?”
이런 뜻이 된다. 결국 나를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비하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자주 [나 같은 사람]이라는 말을 한다. 나 부터서. 사람은 저마다 희망과 사랑을 품고 살지만 많은 실패를 겪고 실수를 거친 다음 자신에 대해 이런 결론을 내린다.
“나는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그런가 봐.” 이 말에 깃든 한마디. “다른 사람은 안 그러는데.....”
그러니까 나만 바보고 못난이라는 것이다.
마가복음서는 초지일관 제자들의 실패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이 복음인 것은 예수님의 이야기일뿐더러 동시에 우리 이야기인 까닭이다.
베드로는 마가복음에서 좌충우돌, 무지몽매, 단순 무식하며 용감하다의 대명사로 그려진다. 그래도 베드로인데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망가진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다.
나와 그리 다를 바 없는 그의 삶의 전기를 통해 묘한 심리적 해방감과 함께 나 자신을 읽는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패를 과감하게, 가감하지 않고 솔직하게 털어놓음으로써 그와 같은 실패를 다시금 반복하는 우리를 도전하게 하고 격려한다.
나 같은 사람 이야기가 나와 같은 사람에게 약이요 힘이 된다. 나의 약함이 너의 강함이 된다.
또 한가지 다른 장애는 글쓰기 능력에 관한 것일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글을 잘 쓰지 못해요.”
그러나 누구나 글을 잘 쓸 수 있다. 창조자(Author)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글을 통해 창조하는 작가(author)적 역량이 모든 사람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믿는다. 다만 그것을 계발하느냐 안 하느냐, 노력하느냐 안 하느냐의 차이일 뿐이다.
조금만 노력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다. 내 자서전 쓰기의 목표는 명문장과 고전의 품격을 지닌 걸작과 대작이 아니다.
내 삶의 주인이 되신 그분과 함께한 지난날을 말하면 그만이다.
무엇보다도 다른 어떤 주제나 내용보다도 잘 쓸 수 있는 단 하나가 있으니 바로 나 자신이다. 내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뿐이다. 내가 써야 한다. 내가 제일 잘 쓸 수 있다.
그러면 왜?
우리가 전기를 읽고 내 삶의 이야기를 전기로 남겨야 하는가?
하나님이 내 삶의 이야기의 저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이야기다. 각 사람은 하나님의 고유한 이야기다.
하나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나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구별되는 독특한 이야기다. 하나님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반영하는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걸작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읽어야 할 많은 전기 중 성경을 제외하고 으뜸으로 읽어야 할 전기가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의 전기다.
그 하나님이 나를 공동저자로 부르시고, 당신의 이야기를 살아내는 주연배우로 발탁하신다. 위대한 소수의 사람만이 아니라 우리 각각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하나님은 쓰고 계신다.
내 이야기는 내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어가시는 이야기의 일부이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의 것이다. 주연배우로 살아낸 것을 공동저자로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저 내 인생의 독자로만 남아 있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결국 전기를 쓰는 것이 전기 읽기의 목적이고 귀결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읽고 싶어 하는 전기는 우리가 살아낸 나의 삶의 전기이다. 최고의 전기는 내가 삶과 글로 쓴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기이다. 우리가 전기의 주인공이고, 전기를 기록해야 할 작가이다. 전기를 읽어, 전기가 되고, 전기를 써야 한다.
나는 하고 싶은 학교가 컴퓨터학교 말고 하나 더 있다. 글쓰기 학교다. 이 학교를 통해 하나님이 공동저자가 되신 [나의 자서전 쓰기]를 집필하게 하는 것이다.(장재언)
긴 글이었습니다.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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