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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하는 길, 버스에서 바라보는 거리의 풍경은 한결같이 신비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눈이 내리면 흰빛으로 물든 세상이 있고 새순이 돋는 봄이면 마음까지 푸르름이 물들곤 한다. 크고 작은 낙엽들이 제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바람결에 이리저리 흔들리는 가을이면 알록달록함과 황금빛에 물든 거리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 그러나 그런 신비한 길을 걸으면서 나는 때때론 한숨을 토해놓고는 한다. 한숨의 저 끝에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존재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 아름다운 사계절의 어느 한 부분을 아픔으로 보내야하는 사람들, 때로는 그 모든 계절을 기억의 저 편에만 간직해야 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계절의 정취는 사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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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출근하는 길에 섬김 간호에 관한 홍보물이 게시판에 붙여있는 걸 보았다. ‘섬김 간호라… 참 좋은 말이구나!’ 그러나 그것이 나의 일이 되었을 때 좋은 일이라는 그런 생각 보다는 사실 귀찮은 마음이 더욱 컸다. 어느 한 여름, 저녁 근무 출근 전에 환자를 대상으로 발마사지를 하기 위해 평소 출근시간보다 조금 일찍 집을 나설 때에는 ‘나도 피곤한데 무슨 발마사지람?’ 그런 아우성이 마음속에서 들려왔던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발마사지를 위해 7층 병동으로 모인 인원은 대략 12명 정도, 2인 1조로 나눠져 발마사지 프로토콜을 보면서 짝꿍과 연습을 했다. 나의 짝꿍은 ICU 선생님이었다. 나의 짝꿍은 일회성 행사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와는 다른 생각이었다. 준비물도 체계적이었고 환자들을 돌본다는 마음도 한결 부드러웠다. 그런 짝꿍 때문일까? 실전에 투입 전 짝꿍과 같이 연습하는 시간도 있어 나중에 부모님께도 요긴하게 써야지 하면서 마음은 들뜨는 기분이었다. 준비된 오일과 타월, 디펜드, 비닐 글러브를 받아들고 병실로 들어섰다. | |
“환자분 오늘 저희가 발마사지를 해드릴 간호사입니다. 혹시 발에 상처가 있거나 특별히 불편한 곳이 있으신가요?”
일부러 상냥한 목소리를 내어 환자에게 그렇게 물어본 후 발마사지 과정을 설명하고 발을 들추게 했다. 손과 달리 발은 부끄러운 부분이다. 우리 몸의 체중을 지탱하며 가장 낮은 곳에서 조용히 애쓰기만 하는 곳. 어두운 신발에 갇혀서 코를 찌르는 냄새를 풍기는 곳. 하지만 참으로 고마운 신체의 한 부분이 아니던가. 내 발이 아닌 환자의 발을 어루만지면서 나는 문득 그런 사실들을 알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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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집 따님들이 이런 수고까지 하시네요.”
조용히 웃어 보이는 환자들을 보며 나와 환자들이 아주 조금 더 가까워진 느낌이다. 이렇듯 입원한 환자들은 나를 신뢰하여 자신의 부끄러운 부분까지 서슴없이 보여주고 있는데 나는 환자에게 과연 얼마나 큰 믿음을 줄 수 있는 간호사인지···. 나를 믿어주는 환자가 오늘따라 참으로 작고 가엾게만 느껴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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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타월로 우선 발을 감싸고 조용히 매만져 준다. 그리고 비닐 글러브를 끼고 오일을 묻혀서 정성스레 발바닥에서 무릎까지 쓸어내리고 주무르고 하면서 프로토콜의 과정대로 10여분 가량을 공들여서 마사지를 한다. 나와 짝꿍이었던 중환자실 선생님을 힐끗 쳐다보니 사뭇 진지하게 하는 터라 나도 눈치를 보며 열심히 따라하려고 했다. 우리 두 손은 양쪽 다리 아래에서 무릎과 발바닥을 분주히 오가면서 그간 쌓은 내공으로 손가락에 힘을 주어 열심히 했다. 이렇듯 마사지를 받으면 모든 병이 나을 것처럼!
내 발을 씻기신 예수님…. 발마사지를 하면서 문뜩 떠오른 문구다. 이 문구를 떠올리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서있었다. 환자의 발을 씻기고 그들의 발을 어루만지는 지금 나의 손길이 따뜻하고 섬세하여 나의 손놀림에 그들이 다치고 상처받지 않기를, 내가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행여 사무적으로 딱딱하게 느껴져 마음의 앙금이 되지 않기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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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마사지! 환자와 내가 교감하면서 이뤄가는 참된 보살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마사지가 끝난 후에는 따뜻한 타월로 다시 발을 감싸고 남아있는 오일을 제거하고 발을 침상에 가지런히 놓아준 뒤 환자를 보니 참으로 평안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미소를 보여준다.
내과 병동에 근무하는 나는 바쁜 스케줄과 업무로 인해 일을 순도 있게 빨리 진행하기에만 바빴던 것 같다. 그런 일상 속에서 나는 환자들에게 심적인 간호는 과연 해왔었는지, 나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그들에게 행여 나의 뒷모습만 보여준 것은 아닌지, 그들의 마음을 더욱 차갑고 혹한 구덩이에 버려두었던 것은 아닌지, 이런 작은 봉사 하나만으로도 그들은 이렇게 나를 향해 환히 웃어줄 수 있는데···. 부끄러운 생각에 나 자신에게 미운 마음이 들었다. |
그 날의 가슴 뭉클함을 오래도록 새길 수 있도록 퇴근 후 고해성사하는 기분으로 잠시 생각에 잠겨 발마사지의 과정을 일기장에 적어보았다.
주님, 당신의 사랑을 오늘 비로소 느낄 수 있었다고, 죄 많은 우리의 발을 어루만져가며 씻기는 주님의 모습이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려 잠시 눈시울이 붉어졌다. 사랑을 받는 것 보다 사랑을 베풀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 사랑으로 인해 나는 얼마나 큰 부자가 될 수 있었는지, 행여 비뚤어지고 해이해진 나의 마음을 다시금 다스리고 다독이며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모병원 안에서 참 사랑, 참 행복을 느끼면서 오래도록 고통에 신음하는 나의 오랜 벗으로 여기는 환자분들에게 나침반이 되어주고 때론 어둠을 밝혀주는 촛불이 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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