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cember 21, 200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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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밤 거룩한 밤 Silent night Holy night
Mahalia Jackson
이 노래가 처음 불려진 니콜라우스 교회
이 노래를 처음 작곡한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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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람비' 스무 여섯 해 동안 패사디나 빈민가에 희망을 심다
일명 '피의 교차로'(blood corner)라 불렸다. LA 근교 패서디나 북서쪽, 하워드 거리와 나바로 거리가 만나는 곳은 남가주 전 지역을 통틀어 낮 시간 동안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1982년 기준) 지역에서 우열을 다투던 갱단의 근거지가 그 교차로를 중심으로 마약 판매와 매매춘을 일삼았다. 대낮에도 총격전이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다. 반대편 갱단원으로 오인 받아 총격을 받은 일도 있었기에, 당시 지역 주민들은 특정 갱단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은 입지 못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일대 어느 지역보다 안전한 곳이 됐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퍼킨스 박사가 '피의 교차로'로 찾아온 까닭?
존 퍼킨스 박사가 '죽음의 교차로'로 터전을 옮긴 건 1982년이다. 고향 미시시피에서 아내 베라 여사와 함께 도시 빈민 선교를 하던 퍼킨스 박사는 사역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패사디나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은 다른 곳을 마다하고 가장 위험하다는 동네에, 그것도 갱단의 본거지 한복판에 둥지를 틀었다. 갱들은 낯선 이웃의 출현에 집에 불을 지르고 짓궂은 총질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다.
퍼킨스 박사가 이사 간 파사데나 북서쪽 지역은 가난에 찌들고, 인종차별에 억눌린 사람들이 모여든 도시 빈민 지역이다. 퍼킨스 박사는 가난이 가정의 해체를 유도했고, 가정의 붕괴는 교육의 부재를 낳았다고 봤다. 교육의 부재는 리더십의 결여와 경제 시스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어져 가난을 심화시킨다고 여겼다. 미래를 잃은 젊은이들은 마약 거래나 갱단에 소속되는 것으로 삶의 안정감을 찾으려고 했고, '감옥을 궁전처럼' 여기며 드나들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퍼킨스 박사는 죽음의 교차로 한 모퉁이에 비집고 들어가 그들의 이웃이 되었다. '커뮤니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 변화를 일구는 첩경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퍼킨스 박사는 주변의 흑인, 라티노 빈민가 어린이들을 집으로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그들은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부모였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고, 숙제를 봐주고, 함께 놀아주었다. 퍼킨스 박사의 이런 섬김이 '하람비'(Harambee Ministries)라는 교육 공동체를 잉태시켰다.
'함께 변화를 일구자'
하람비는 '함께 변화를 일구자'(let's get together and push)는 뜻의 아프리카 말로 변혁을 위한 연대와 화합을 의미한다. 하람비는 '사람을 키우는 일'을 존재 목적으로 삼고, 지난 26년간 지역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지역사회 리더로 커갈 수 있도록 안전한 쉼터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가난과 절망이 쌓아 올린 두껍고 높은 벽을 허물고 나올 수 있는 지역사회의 리더(Indigenous Leader)를 키워내는 게 하람비의 목표였다.
올해로 26년째를 맞은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에는 50여 명의 지역 어린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여름 캠프(83년부터)에는 60여 명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 6세부터 12세까지는 하람비사립학교(95부터)에 다닐 수 있다. 입학식날 '하람비 사립학교에 들어가길 2년 동안 기도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탁월한 교육 프로그램과 교사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Teaching Like Jesus Ministries' 등의 단체로부터 '어린이 사역 최고 실천상' 등을 받기도 했다. 많은 사역 단체들이 하람비의 도시 빈민 지역 어린이를 위한 교육 모델은 응용하고 있다.
'배움의 자리서 섬김의 자리로'
하람비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자리로 들어가 섬김의 자리로'(Enter to Learn, Exit to Serve) 나아갈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13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은 '주니어 스태프'(89년부터)라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주니어 스태프는 청소와 저학년들의 공부를 돕고 일정액을 장학금으로 지원받는다. 2008년에는 44명이 참여했고, 총 4만 6,000불이 지급됐다. 2008년, 노스웨스트 패서디나 지역에서 가장 많은 청소년을 고용한 단체가 하람비였다.
그렇게 하람비는 절망과 가난으로 찌든 어둠의 교차로를 조금씩 밝혀나갔다. 하람비를 드나드는 동네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마약을 팔던 이들도, 매춘을 하던 천막도, 총질을 해대던 갱단도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북서쪽 패서디나 빈민가의 '성시화'는 그렇게 조용히 진행됐다.
하람비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졸업생들이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람비를 다녔던 마키스는 마약 중독자였던 가족들과의 삶을 단절하고, 이웃을 돕고 싶다며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하람비 사역을 돕고 있다. 또 알콜 중독으로 아버지와 두 형을 잃은 커티스는 하람비를 졸업하고, 경찰학교에 들어가 임관을 앞두고 있다. 주니어 스탭으로 일했던 빅터는 하람비 학생들을 자신의 이발소로 초청해 무료로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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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body nobody but you 김관형 선교사
도로변에서 트리를 팔고 있는 상점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정말 특별하다. 그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장식과 캐럴에서 뿐 아니라 필리핀 사람들의 정신과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에선 성탄일 전까지 대림절(待臨節)기간에 9일 동안 매일 ‘심방가비(새벽미사)’라는 밤 미사를 드린다. 그래서 자정 전부터 아침까지 성당 근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성당 안에 들어간 사람들 보다 많은 밖에서 미사에 참예하는 사람들을 위해 불가피하게 밖으로 확성기 소리를 밤새 내보낸다.
그 찬양소리, 설교소리 그리고 사람이 왕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계절의 맛을 느낀다. 성탄장식도 교회나 가정, 영업장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공서나 기업들의 빌딩, 학교나 병원 등에도 대대적으로 한다. 그것이 11월이면 준비가 다 끝난다.
다만 한국인을 비롯한 타국인들의 집에는 거의 성탄준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빠진 이빨처럼 드문드문 불이 꺼져 있어서 옥에 티가 된다. 또한 캐럴도 10월부터 간간히 들린다. 필리핀 사람들은 7-8월에도 농담 삼아 크리스마스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방송진행자들도 크리스마스 100일을 앞둔 9월부터는 100일이 남았느니, 99일이 남았느니 하면서 자주 얘기한다. 그런데 올핸 아무래도 ‘노바디의 열풍’에 밀려 크리스마스 캐럴이 맥을 못 추는 것 같다. 필리핀 군도를 강타한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어디서나 아침부터 밤중까지 대세로 이어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Silent night, Holy night’ 보다는 ‘Nobody nobody but you.’가 쏟아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노바디’는 ‘나는 너 뿐이다.’라는 연애감정을 표현한 말이지만 여러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노이 아키노 Jr.’ 상원의원을 향하여서 그 지지자들이 “Nobody nobody but you(오직 당신뿐이다).” 또는 “Noynoy Nonoy but you(노노이, 오직 당신뿐이다.).”라고 합창을 해준다. 아마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신부(神父) 한 분이 강론을 하면서 “Nobody nobody but you.”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이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는 말씀이다. 필리핀에 많은 문제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해주기 바라지 말고 바로 내가 해야 한다라는 강력한 권면이다. 한편 얼마 전에도 납치되었던 아일랜드 신부(神父) 선교사가 풀려났는데 지난 13일에도 집단으로 억류됐던 46명이 풀려났다. 모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이 종교와 이해를 초월하여 온 국민에게 더 없는 연말의 선물이 될 것이다.
온도이 태풍으로 인한 수십만의 피해자들, 화재로 인한 수만 명의 이재민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 설교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필리핀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Nobody nobody but y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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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위클리프가옥스퍼드대학에서쫓겨난 이유심호섭 목사의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교회와 세계사
존 위클리프 14세기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University of Oxford)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가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성경을 영어로 번역을 추진하였던 중세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위클리프는 1370년대 옥스퍼드대학에서 차츰 당시로는 급진적인 종교적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교리를 부인하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교황직은 성경적 정당성이 없으며, 교황을 적그리스도와 같다고 보았는데 14세기 교황권이 분열되자 교황권이 붕괴되는 전조라고 환영했습니다. 결국 그는1378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위클리프의 몇몇 옥스퍼드대학의 동료 학자들을 중심으로 헤러퍼드의 니콜라스의 지도 아래 모인 그룹과 운동을 반대자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 롤라드파입니다. 롤라드라는 이름은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에르트(lollaert)에서 유래한 경멸어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시대에 개신교를 지칭하기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저항자 혹은 반항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쓰여지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롤라드 그룹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대학 바깥에서도 추종자를 얻었습니다. 이 파는 도시민, 상인, 그리고 귀족 다음의 계급인 젠트리(gentry) 심지어 말단 성직자 사이에서 차츰 늘어났으며 소수의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왕실의 몇몇 기사들도 지지를 보냈습니다. 1399년 헨리 4세(King Henry IV)가 즉위하자 탄압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소트레이가 화형당해 롤라드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헨리 5세(Henry V) 때에는 더 큰 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지하로 몰린 이 운동은 소수는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주로 상인과 장인들 사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500년경 롤라드파 부흥이 시작되었고, 1530년 이전부터 롤라드파와 새로운 세력인 프로테스탄트가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롤라드파 전통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촉진시켰습니다. 초기 롤라드파의 가르침은 1395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12 결론/ Twelve Conclusions〉에서 가장 잘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영국 교회가 '계모인 거대한 로마 교회'에 예속되었다는 진술로 시작해서 로마 교회의 서품식은 성경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으므로 현재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가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비정상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화체라는 '거짓 기적'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오도하고 포도주와 빵, 제단, 제사복 등을 신성시하는 것은 마술과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인간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는 세속의 재판관과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죽은 사람을 위한 특별기도, 순례, 성상에의 봉헌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는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아가서 전쟁은 성경과 모순되며, 순결에 대한 맹세 때문에 수녀들은 낙태와 유아살해의 공포에 떨고 있고,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미술과 공예가 쓸데없이 '낭비와 호기심, 허세'를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2 결론]은 롤라드파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포괄했으나 여기 포함되지 않은 중요한 2가지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이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롤라드파는 성경을 영어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
로댕의 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
사진이 안보일 때 이렇게 하십시오
1. 사진이 절반만 보일 때는 화면을 다시한번 여십시오.(Refresh 단추 클릭) 2. 어떤 사진 한 장이 안보이고 X 표가 보일 때는 그림위에 마우스포인터를 올리고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한 후 메뉴중 Show Picture 를 클릭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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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한국 교회의 바른이해를 돕기 위한 기자회견에서 가브리엘 박사가 견해를 이야기하고 있다(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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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럴 로버츠 목사 별세
60년간 35개국에서 사역
TV 복음전도자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럴 로버츠 목사가 15일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사진은 오럴로버츠 대학교에서 설교하던 최근의 모습
미국의 오순절파 TV 복음전도자인 오럴 로버츠 목사가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미국 언론들은 로버츠 목사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그가 15일 캘리포니아 주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로버츠 목사는 13일 자택에서 넘어져 골절 부상으로 입원한 뒤, 치료 도중 급성 폐렴 증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TV 복음전도자를 가리키는 ‘텔레반젤리스트(televangelist)’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로버츠 목사는 1940년대와 50년대 이동식 대형 천막에서의 치유 집회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 라디오 방송 목회와,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텔레비전 목회 분야를 개척하면서 전 세계 수백만 시청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로버츠 목사는 약 60년간의 사역 기간 동안 전 세계 35개 국가에서 3백여 회 이상의 치유 집회를 열었으며, 2백 만 명 이상에게 안수 기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오럴로버츠전도협회(OREA)와, 1963년 오럴로버츠대학교(ORU)를 설립했으며, 저서로는 세 권의 자서전을 비롯해 ‘씨앗의 믿음의 기적(Miracle of Seed-Faith)’ 등 130여 권이 있다. 로버츠 목사의 뜻밖의 사망 소식에 미국 오순절 교회를 비롯한 세계 교계 각처에서는 추모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며 고인의 삶을 기리고 있다. 국제 포스퀘어 가스펠 교단은 성명을 통해 “하나님과 로버츠 목사의 사역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오순절 운동은 없을 것”이라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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