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비젼소식

[스크랩] 비젼통신

어울령 2009. 12. 22. 18:24

 

 

 

 

 

 

December 21, 2009

 

 

 

 

 

 

고요한 밤 거룩한 밤

Silent night Holy night

 

Mahalia Jackson


 

울면서 맞이하는 성탄절

 

한 주일에 한번씩 의미 있고 좋은 음악을 찾아 비전통신에 소개한다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고르기도 여간 힘들 일이 아니었다.       

이 곡 저 곡 고르고 또 골라 듣고 또 듣고... 그리고 난 후 감동 있는 곡을 최후로  결정하게 된다.

 

이 번 주 비전통신의 노래는 [고요한밤 거룩한 밤]이다.  누구나 잘 아는 노래이다. 그러나 마할리아의 노래는 다르다. Merry Christmas가 아니라 Cry Christmas가 되게 하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사실 크리스마스가 흥청대는 백화점의 경기를 따라 평가되는 시대가 되면서 그 의미는 사라지고 말았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가운데 아기 예수는 어디론가 사라진 지 오래 되었다.

 

마할리아는 이 노래를 부르면서 말구유에 나신 아기 예수를 생각나게 한다. 왜 주님이 세상을 찾아 오셨는가를 묵상하게 한다. 십자가를 가슴에 안게 한다.  그의 노래는 나를 엉엉 울게 하였다.

 

마할리아 잭슨 Mahalia Jackson (1911-1972)은 1911년 10월 26일 미국 루이지애나(Louisiana)주, 뉴올리언스(New Orleans)출생, 1972년 1월 27일 사망했다.

 

한국의 젊은 세대에게는 잊혀진 흑인 여가수이다. 6.25 피난 시절, 전투 중인 주한 미군 위문 차 그녀는 내한한다. 미군은 물론 한국의 지식인들도 그녀의 열창에 환호했다

 

그녀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스펠 여성 싱어이다. '가스펠의 전설'로도 불리운다. 가스펠 송은 그녀에 의해 전세계에 전파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울의 여왕 아레사 프랭클린을 비롯한 여러 소울 가수들의 영웅이 바로 마할리아 잭슨이다.

 

빌리 할리데이처럼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그녀는 가난한 딸로 태어났기에 악보도 알파벳도 읽을 수 없었고 식당종업원, 청소부를 전전해야 했지만 고난의 삶을 딛고 최고의 가스펠 아티스트가 되었다.

 

1911년 뉴올리언즈에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침례교회를 다니면서 가스펠을 체득했다. 가스펠을 배우면서도 마할리아는 마 레이니(Ma Rainy)와 베시 스미스(Bessie Smith) 같은 재즈와 블루스에 심취했다.

 

열 여섯 살이던 1927년부터 그녀는 침례교회의 집회나 성가대에서 탁월한 가창력으로 가스펠을 부르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7년 뒤 1935년 한 장례식에서 노래한 것이 레코드 관계자의 눈에 띄어 직업 가수로 활동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그녀는 ''가스펠의 전설''이 된다. 이후 영혼을 울리는 고도의 테크닉과 폐부 저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탁월한 음빛깔은 전 세계인들을 감동시킨다.

 

마할리아 잭슨은 1960년대 가장 중요한 사회 문제였던 흑인 민권 운동에 상징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그녀가 부른 프로테스트 송 ''We Shall Overcome''은 당시 인권 운동의 찬가였다. 마할리아는 특히 1961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식과 마틴 루터 킹 목사의 그 유명한 워싱턴 연설에 앞서 열창했으며, 1968년 킹 목사의 장례식 때도 애도 곡을 불렀다. 그리고 그녀가 세상을 떠난 1972년 자신을 존경한 후배 가수 아레사 프랭클린이 장례식에서 가스펠 ''Precious Lord''를 불렀다.

 

마할리아 잭슨은 1972년 1월 27일 투병 중이던 당뇨병의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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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노래가 처음 불려진 니콜라우스 교회

이 노래를 처음 작곡한 악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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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처럼 네가 내려와

 

정은채

 

 

안부 궁금해

하늘 향해 하얀 웃음 건네니

너 또한 그리움에

가슴 열어 내게 오는지

 

백설이 난 분분 흩날려

그 높은 곳에서 보풀보풀 풀어져

하얗게 내려앉는구나

 

흩어지지 않게

날아가지 않게

 

지난날 익어가던 사랑을 보듬듯

두 눈에 담고 보니

 

하염없이 허공을 떠도는 너도

 

긴 이별이 서러워 어둠 사른 채

시리도록 눈부신 설야에 잠 못 이루고

한밤 내

하이얀 눈으로 내게 와서

차가운 심장에 얼음 꽃이 되었구나


 

 

 

 

 

 

 

 

 

 

 

 

 

'하람비'

스무 여섯 해 동안

패사디나 빈민가에

희망을 심다

 

 

일명 '피의 교차로'(blood corner)라 불렸다.

LA 근교 패서디나 북서쪽, 하워드 거리와 나바로 거리가 만나는 곳은 남가주 전 지역을 통틀어 낮 시간 동안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1982년 기준)

지역에서 우열을 다투던 갱단의 근거지가 그 교차로를 중심으로 마약 판매와 매매춘을 일삼았다. 대낮에도 총격전이 심심찮게 벌어지곤 했다. 반대편 갱단원으로 오인 받아 총격을 받은 일도 있었기에, 당시 지역 주민들은 특정 갱단을 상징하는 색깔의 옷은 입지 못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그 일대 어느 지역보다 안전한 곳이 됐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하람비(표시된 부분)가 위치한 하워드 거리와 나바로 거리가 만나는 곳.

한때 남가주 전 지역을 통틀어 가장 위험한 지역이었다.

 

 

퍼킨스 박사가 '피의 교차로'로 찾아온 까닭?

 

 

 

 

 

 

 퍼킨스 박사 부부. 17살에 호된 가난을 피해 고향 미시시피를

무작정 떠났던 퍼킨스 박사는 그리스도인 된 뒤 고향으로 돌아와

빈민가에 교회를 세우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민들의 자립을 도왔다.

 

 

 

존 퍼킨스 박사가 '죽음의 교차로'로 터전을 옮긴 건 1982년이다. 고향 미시시피에서 아내 베라 여사와 함께 도시 빈민 선교를 하던 퍼킨스 박사는 사역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무렵, 패사디나로 거처를 옮겼다. 이들은 다른 곳을 마다하고 가장 위험하다는 동네에, 그것도 갱단의 본거지 한복판에 둥지를 틀었다. 갱들은 낯선 이웃의 출현에 집에 불을 지르고 짓궂은 총질로 환영 인사를 대신했다. 

 

퍼킨스 박사가 이사 간 파사데나 북서쪽 지역은 가난에 찌들고, 인종차별에 억눌린 사람들이 모여든 도시 빈민 지역이다. 퍼킨스 박사는 가난이 가정의 해체를 유도했고, 가정의 붕괴는 교육의 부재를 낳았다고 봤다. 교육의 부재는 리더십의 결여와 경제 시스템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이어져 가난을 심화시킨다고 여겼다. 미래를 잃은 젊은이들은 마약 거래나 갱단에 소속되는 것으로 삶의 안정감을 찾으려고 했고, '감옥을 궁전처럼' 여기며 드나들었다.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을 선택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퍼킨스 박사는 죽음의 교차로 한 모퉁이에 비집고 들어가 그들의 이웃이 되었다. '커뮤니티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보다 '커뮤니티가 되는 것'이 변화를 일구는 첩경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퍼킨스 박사는 주변의 흑인, 라티노 빈민가 어린이들을 집으로 불러 모으기 시작했다. 동네 아이들에게 그들은 선생님이자 친구이자 부모였다. 아이들에게 음식을 해 먹이고, 숙제를 봐주고, 함께 놀아주었다. 퍼킨스 박사의 이런 섬김이 '하람비'(Harambee Ministries)라는 교육 공동체를 잉태시켰다.

 

 

 

 

 

하람비 소극장에 그려진 벽화. 20여 년 전 이곳은

매춘을 하던 텐트가 있던 곳이다.

 

 

 

'함께 변화를 일구자'

 

 

 

 

 

 

 매년 여름 캠프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인턴을 모집한다.

6주 동안 학생들에게 다인종 문화 속의 도시 빈민 사역에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850불을 지급한다.

 

 

 

하람비는 '함께 변화를 일구자'(let's get together and push)는 뜻의 아프리카 말로 변혁을 위한 연대와 화합을 의미한다. 하람비는 '사람을 키우는 일'을 존재 목적으로 삼고, 지난 26년간 지역의 어린이와 청소년이 지역사회 리더로 커갈 수 있도록 안전한 쉼터와 배움의 기회를 제공해왔다.

가난과 절망이 쌓아 올린 두껍고 높은 벽을 허물고 나올 수 있는 지역사회의 리더(Indigenous Leader)를 키워내는 게 하람비의 목표였다.

 

올해로 26년째를 맞은 '방과후학교 프로그램'에는 50여 명의 지역 어린이들이 참여하고 있다. 해마다 열리는 여름 캠프(83년부터)에는 60여 명의 어린이들이 다양한 배움의 기회를 누리고 있다.
 

6세부터 12세까지는 하람비사립학교(95부터)에 다닐 수 있다. 입학식날 '하람비 사립학교에 들어가길 2년 동안 기도했다'는 말이 나올 만큼 지역에서 인기가 높다. 탁월한 교육 프로그램과 교사들의 헌신적인 섬김으로 'Teaching Like Jesus Ministries' 등의 단체로부터 '어린이 사역 최고 실천상' 등을 받기도 했다. 많은 사역 단체들이 하람비의 도시 빈민 지역 어린이를 위한 교육 모델은 응용하고 있다.

 

 

 

 

 

 2세부터 40세까지. 하람비는 교육 공동체이자 가족 공동체다. 하람비의 역할은 학생들이 졸업한 이후에도 지속된다. 매주 한 번씩 졸업생들과의 만남을 갖고 진학, 취업, 가정 상담을 해주고 있다.

 

 

 

'배움의 자리서 섬김의 자리로'

 

 

 

 

 

 

하람비 주니어 스태프로 참여한 지역 청소년들. 작년에는 주니어 스텝 학생들이 500불을 모아서,

입술갈림증(언챙이) 어린이의 수술비를 지원하기도 했다.

 

 

하람비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자리로 들어가 섬김의 자리로'(Enter to Learn, Exit to Serve) 나아갈 수 있는 기회도 제공한다. 
 

13세에서 18세 사이의 청소년은 '주니어 스태프'(89년부터)라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 주니어 스태프는 청소와 저학년들의 공부를 돕고 일정액을 장학금으로 지원받는다. 2008년에는 44명이 참여했고, 총 4만 6,000불이 지급됐다. 2008년, 노스웨스트 패서디나 지역에서 가장 많은 청소년을 고용한 단체가 하람비였다.

 

그렇게 하람비는 절망과 가난으로 찌든 어둠의 교차로를 조금씩 밝혀나갔다. 하람비를 드나드는 동네 아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하자, 마약을 팔던 이들도, 매춘을 하던 천막도, 총질을 해대던 갱단도 조금씩 자리를 옮겨가기 시작했고,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북서쪽 패서디나 빈민가의 '성시화'는 그렇게 조용히 진행됐다. 

 

하람비의 역사가 길어지면서 졸업생들이 지역사회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초등학교 때부터 하람비를 다녔던 마키스는 마약 중독자였던 가족들과의 삶을 단절하고, 이웃을 돕고 싶다며 고등학교 졸업 이후, 하람비 사역을 돕고 있다. 또 알콜 중독으로 아버지와 두 형을 잃은 커티스는 하람비를 졸업하고, 경찰학교에 들어가 임관을 앞두고 있다. 주니어 스탭으로 일했던 빅터는 하람비 학생들을 자신의 이발소로 초청해 무료로 섬기고 있다. 
 

 

 

 

 

 퍼킨스 박사를 이어 지난 10여 년 동안 카라스코 부부가

하람비의 살림을 꾸려오다, 지금은 부르더호프 공동체 멤버들이

하람비 사역을 돕고 있다.

 

 

 

 

 

 

 

 

 

 

 

 

Nobody nobody but you

김관형 선교사

 

 
 

 

도로변에서 트리를 팔고 있는 상점

 

필리핀의 크리스마스는 정말 특별하다. 그것은 겉으로 나타나는 장식과 캐럴에서 뿐 아니라 필리핀 사람들의 정신과 삶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성당에선 성탄일 전까지 대림절(待臨節)기간에 9일 동안 매일 ‘심방가비(새벽미사)’라는 밤 미사를 드린다.

그래서 자정 전부터 아침까지 성당 근처는 사람들과 자동차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성당 안에 들어간 사람들 보다 많은 밖에서 미사에 참예하는 사람들을 위해 불가피하게 밖으로 확성기 소리를 밤새 내보낸다.

 

그 찬양소리, 설교소리 그리고 사람이 왕래하는 소리를 들으며 계절의 맛을 느낀다. 성탄장식도 교회나 가정, 영업장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관공서나 기업들의 빌딩, 학교나 병원 등에도 대대적으로 한다. 그것이 11월이면 준비가 다 끝난다.

 

다만 한국인을 비롯한 타국인들의 집에는 거의 성탄준비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빠진 이빨처럼 드문드문 불이 꺼져 있어서 옥에 티가 된다. 또한 캐럴도 10월부터 간간히 들린다. 필리핀 사람들은 7-8월에도 농담 삼아 크리스마스 얘기를 꺼낸다. 그리고 방송진행자들도 크리스마스 100일을 앞둔 9월부터는 100일이 남았느니, 99일이 남았느니 하면서 자주 얘기한다. 
 

그런데 올핸 아무래도 ‘노바디의 열풍’에 밀려 크리스마스 캐럴이 맥을 못 추는 것 같다. 필리핀 군도를 강타한 원더걸스의 노바디가 어디서나 아침부터 밤중까지 대세로 이어가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입에서 ‘Silent night, Holy night’ 보다는 ‘Nobody nobody but you.’가 쏟아지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노바디’는 ‘나는 너 뿐이다.’라는 연애감정을 표현한 말이지만 여러 경우에 적용할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대통령 후보로 나선 베니그노 아키노 전 상원의원과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노노이 아키노 Jr.’ 상원의원을 향하여서 그 지지자들이 “Nobody nobody but you(오직 당신뿐이다).” 또는 “Noynoy Nonoy but you(노노이, 오직 당신뿐이다.).”라고 합창을 해준다. 아마도 선거가 끝날 때까지 그렇게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런가 하면 신부(神父) 한 분이 강론을 하면서 “Nobody nobody but you.”라는 말을 네 번이나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 내용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당신이 그것을 해야만 한다.’라는 말씀이다. 필리핀에 많은 문제가 있는데 다른 사람이 그것을 해주기 바라지 말고 바로 내가 해야 한다라는 강력한 권면이다. 
 

한편 얼마 전에도 납치되었던 아일랜드 신부(神父) 선교사가 풀려났는데 지난 13일에도 집단으로 억류됐던 46명이 풀려났다. 모르긴 하지만 이런 것들이 종교와 이해를 초월하여 온 국민에게 더 없는 연말의 선물이 될 것이다.

 

온도이 태풍으로 인한 수십만의 피해자들, 화재로 인한 수만 명의 이재민들 그리고 정치, 경제,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그 설교의 말씀처럼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필리핀 사람들의 손에 달렸다.    “Nobody nobody but you.”

 

 

 

 

 

 

 

 

 

 

 

 

 

 

 

 

 

 

 

존 위클리프

옥스퍼드대학에서

쫓겨난 이유

 

심호섭 목사의

커피 한잔과 함께하는 교회와 세계사

 

존 위클리프

14세기의 유럽은 종교개혁의 여명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University of Oxford)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였던 존 위클리프(John Wycliff)가 있습니다. 그는 최초로 성경영어로 번역을 추진하였던 중세 종교개혁의 선구자 중에 한 사람입니다.
 

위클리프는 1370년대 옥스퍼드대학에서 차츰 당시로는 급진적인 종교적 견해를 주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 교리를 부인하고, 설교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성경이 기독교 교리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교황직은 성경적 정당성이 없으며, 교황적그리스도와 같다고 보았는데 14세기 교황권이 분열되자 교황권이 붕괴되는 전조라고 환영했습니다. 결국 그는1378년 옥스퍼드대학에서 쫓겨났습니다.
 

위클리프의 몇몇 옥스퍼드대학의 동료 학자들을 중심으로 헤러퍼드의 니콜라스의 지도 아래 모인 그룹과 운동을 반대자들이 이름을 붙인 것이 롤라드파입니다.
 

롤라드라는 이름은 '중얼거리는 사람'을 뜻하는 중세 네덜란드어 롤라에르트(lollaert)에서 유래한 경멸어입니다. 마찬가지로 종교개혁시대에 개신교를 지칭하기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즉 저항자 혹은 반항자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지금도 쓰여지는 이름이 된 것입니다.
 

롤라드 그룹은 핍박에도 불구하고 옥스퍼드대학 바깥에서도 추종자를 얻었습니다. 이 파는 도시민, 상인, 그리고 귀족 다음의 계급인 젠트리(gentry) 심지어 말단 성직자 사이에서 차츰 늘어났으며 소수의 하원의원뿐만 아니라 왕실의 몇몇 기사들도 지지를 보냈습니다.
 

1399년 헨리 4세(King Henry IV)가 즉위하자 탄압의 물결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소트레이가 화형당해 롤라드파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고, 헨리 5세(Henry V) 때에는 더 큰 탄압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후 지하로 몰린 이 운동은 소수는 성직자들의 지원을 받으며, 주로 상인과 장인들 사이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1500년경 롤라드파 부흥이 시작되었고, 1530년 이전부터 롤라드파와 새로운 세력인 프로테스탄트가 결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롤라드파 전통은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을 촉진시켰습니다.
 

초기 롤라드파의 가르침은 1395년 의회에 제출하기 위해 작성된 〈12 결론/ Twelve Conclusions〉에서 가장 잘 진술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는 영국 교회가 '계모인 거대한 로마 교회'에 예속되었다는 진술로 시작해서 로마 교회의 서품식은 성경적으로 아무 근거가 없으므로 현재의 성직자들은 그리스도가 임명한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성직자의 독신생활은 비정상적인 욕망을 불러일으키며, 화체라는 '거짓 기적'은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오도하고 포도주와 빵, 제단, 제사복 등을 신성시하는 것은 마술과 연결된다고 했습니다. 또한 어떤 인간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고위 성직자는 세속의 재판관과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 되며, 죽은 사람을 위한 특별기도, 순례, 성상에의 봉헌을 비난했습니다.
 

그리고 고해성사는 구원에 불필요한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나아가서 전쟁은 성경과 모순되며, 순결에 대한 맹세 때문에 수녀들은 낙태와 유아살해의 공포에 떨고 있고, 마지막으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많은 미술과 공예가 쓸데없이 '낭비와 호기심, 허세'를 부추겼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12 결론]은 롤라드파의 모든 중요한 교리를 포괄했으나 여기 포함되지 않은 중요한 2가지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성직자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설교이고,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언어로 된 성경에 자유롭게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롤라드파는 성경을 영어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로댕조각 [생각하는 사람]은 단테의 [신곡]을 주제로 한
[
지옥의 문]이라는 작품 중 지옥의 문 앞에서
인간의 고뇌와 삶을 바라보는 [
시인]의 모습입니다.


 

 

사진이 안보일 때 이렇게 하십시오

 

1. 사진이 절반만 보일 때는 화면을 다시한번 여십시오.(Refresh 단추 클릭)

2. 어떤 사진 한 장이 안보이고  X 표가 보일 때는 그림위에 마우스포인터를 올리고 오른쪽 마우스를 클릭한 후 메뉴중  Show Picture 를  클릭하십시오.

 

 

 

 

 

 

 

 

 

 

 

 

 

 

 

         

    


 

하비 콕스의 [바보들의 축제](The Feast of Fools,1971)를 공부한지 40년이 되어가는데 나는 아직 바보가 아닙니다. 아니 2000여 년 전 아기 예수님이 바보처럼 말구유에 태어나셨는데 그를 따른다는 나는 아직도 바보가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오늘 어딘지 슬프게 부르는 마할리아 잭슨의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따라 부르며 울면서 크리스마스를 맞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아닙니다. 바보가 되기는커녕 엘리트가 되기 위해 분주하게 뛰었습니다. 엘리트로 행세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나 뿐이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어쩌면 엘리트가 되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사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이 엘리트가 되지 못하면 자식들이라도 엘리트가 되어야 합니다. 자식마저 안 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엘리트 사위나 며느리를 얻어야 합니다.

 

하지만 엘리트주의가 만연할수록 그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끔 입으로는 하나님께 '립 서비스'를 하지만 높아진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엘리트 의존적이 되었습니다. 자신뿐 아니라 예수님마저 엘리트 그리스도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어쩌지요.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는 엘리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결코 엘리트라고 할 수 없는 비천한 존재로 오셨습니다. 엘리트를 위한 교육환경이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서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맞기까지 그분의 일생은 엘리트와는 거리가 먼 인생이었습니다.

 

그분께서 그렇게 별 볼일 없는 가난한 존재로 역사 속에 등장하시고 비참한 존재로 십자가에서 생을 마감한 것은 그러나 인류에게 새로운 역사를 여는 사건이요 순간이었습니다. 하나님나라는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려는 자도 그분처럼 낮아지고 비워져야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그분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조하셨습니다.

 

하나님나라는 작은 자들(어린아이), 낮아진 자들(섬기는 자)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엘리트가 아니라 작은 자가 되고 낮은 자가 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나라를 진실 되게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오직 바보만이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 하나로 세상을 바꿔보려 시도하겠지요. 그렇다면 예수님이야말로 바보였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바보들만이 그를 추종하다가 그가 처형당한 뒤에 그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을 거예요. 따라서 사도들은 모두 바보였다고 하겠습니다. 그 바보들이 전하는 메시지를 진지하게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 또한 같은 바보들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시방 우리 모두가 바보라는 그런 말이올시다."

 

그는 이어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에요. 하나님께서는 유식한 학자가 아니라 겸손한 목수를 택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또 어부와 세리들을 사도들로 뽑으셨지요. 우리가 과연 그들보다 낫다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물론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도, 복음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과 학력 사이에 아무 관계가 없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 모두 바보임을 기꺼이 시인합시다. 그러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에 마음 놓고 몸을 던질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분처럼 이웃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느끼며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지고 당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아픔과, 그분의 몸인 교회가 겪는 고난을 대신 지기 위해서는 우리도 그분처럼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엘리트가 되기 위해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은 남이 잘못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흠까지 들추어냅니다. 그런 사람이 다른 이의 허물을 덮어 주고 부족함과 고통까지 대신 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다른 이의 게으름을 질타하고, 능력 없음을 비웃으면서 그들의 불행은 오직 그들 자신의 책임임을 지적하면서 스스로 정의로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할 것입니다.

 

그러나 온전한 자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엘리트가 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처럼 바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직 바보만이 어둠 속에서 빛을 보고, 불행 안에 있는 행복을 보기 때문에 남을 이해하고 남을 위해 살 수 있기 때문에.....  오직 바보만이 모두를 끌어안고 어리석은 주님의 사랑을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 덕에 엘리트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만, 예수님을 닮아 바보가 되려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마 이것이 이 땅의 교회들이 하나님나라의 참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아닌가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아기 예수님처럼 바보가 되려는 생각이 없다면 이 좋은 명절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장재언)

 

 

 

 

 

 

 

 

 

 

 

 

 

 

 

 

이슬람에 대한 한국 교회의 바른이해를 돕기 위한 기자회견에서

가브리엘 박사가 견해를 이야기하고 있다(가운데).    

 

 

 

전 이맘 가브리엘 박사 주장

이슬람교는 세계인권선언과 배치

 

이슬람 모스크에서 이맘으로 활동하다 기독교로 개정한 전 이집트 알 아즈하르대학 교수 마크 A. 가브리엘 박사는 한국에서 이슬람의 실체와 문제점을 밝히면서 유엔이 정한 인권 차원에서 문제점을 지적했다.
 

지난 11일 한국교회언론회 사무실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가브리엘 박사는 1948년 유엔이 선포한 ‘세계인권선원’의 조목들을 언급하며 인권유린 상황의 내용을 밝히며 이슬람교가 천부인권을 유린하는 종교라고 말했다.
 

그가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제1조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 자유롭고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하다’고 주장했지만 이슬람을 비 이슬람보다 우월한 종교로 간주해 비 무슬림을 살해해도 처벌받지 않는 것이 그 예다”고 했다.
 

또 “7조에서는 ‘모든 사람은 법 앞에 평등하고, 평등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다고 했으나 이슬람에서는 비무슬림이 단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살해 당해도 처벌이 안되고 있다. 2007년 고 배형규 목사와 심성식 형제가 살해당한 이유도 단순히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뿐이다.”고 했다.
 

또 “성년의 남녀는 인종, 국적, 종교에 따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혼인할 수 있지만 무슬림 내에서도 남자는 네 여자와 결혼할 수 있고 이혼할 권리가 있으며, 타종교인과 결혼할 수 있다”며 인권선언 16조를 비교했다.
 

이외에도 일부 무슬림 지역에서의 노예제도 존재, 배교자에 대한 공개처형, 잔혹한 처벌 등의 성행에 대해서도 강하게 비판했다.
 

가브리엘 교수는 유럽에서 벌어지는 이슬람화가 한국에게 결코 남의 나라 일이 아닌 것으로 교훈 삼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슬람은 개인 삶의 24시간을 지배하는 종교로 국가의 근간을 뒤집는 힘이 있다. 절대 기독교 국가였던 이집트, 리비아, 터키가 예다. 프랑스와 스위스도 이슬람화의 위험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이미 한국에 극단적 이슬람 세력권에 들어와 있다고 분석했다. 그 예로 한국의 모 성원에서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기본 서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에게 가장 큰 가르침을 준 책으로 알려진 ‘The Soul’s Journey After Death'을 발견했으며 상당수 배포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또 “자신이 한국에서 만난 무슬림들이 결코 온순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가브리엘 박사는 ‘이슬람과 유대인’, ‘이슬람과 테러리즘’, ‘무함마드와 함께하는 커피 한 잔’ 등 다섯 권의 저서가 한국어로 번역된 것을 기념해 한국을 방문했다.


 

 

 

 

 

 

 

 

 

 

 

 

오럴 로버츠 목사 별세

 

60년간 35개국에서 사역

 

 

 

TV 복음전도자로 전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럴 로버츠 목사가 15일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사진은 오럴로버츠 대학교에서 설교하던 최근의 모습

 

 

미국의 오순절파 TV 복음전도자인 오럴 로버츠 목사가 9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미국 언론들은 로버츠 목사 대변인의 말을 인용해, 그가 15일 캘리포니아 주의 한 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폐렴 합병증으로 숨을 거뒀다고 보도했다. 로버츠 목사는 13일 자택에서 넘어져 골절 부상으로 입원한 뒤, 치료 도중 급성 폐렴 증세를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TV 복음전도자를 가리키는 ‘텔레반젤리스트(televangelist)’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로버츠 목사는 1940년대와 50년대 이동식 대형 천막에서의 치유 집회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해, 1960년대와 70년대에 이르러 라디오 방송 목회와, 당시로서는 생소하던 텔레비전 목회 분야를 개척하면서 전 세계 수백만 시청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로버츠 목사는 약 60년간의 사역 기간 동안 전 세계 35개 국가에서 3백여 회 이상의 치유 집회를 열었으며, 2백 만 명 이상에게 안수 기도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47년 오럴로버츠전도협회(OREA)와, 1963년 오럴로버츠대학교(ORU)를 설립했으며, 저서로는 세 권의 자서전을 비롯해 ‘씨앗의 믿음의 기적(Miracle of Seed-Faith)’ 등 130여 권이 있다.
 

로버츠 목사의 뜻밖의 사망 소식에 미국 오순절 교회를 비롯한 세계 교계 각처에서는 추모 성명을 연이어 발표하며 고인의 삶을 기리고 있다. 국제 포스퀘어 가스펠 교단은 성명을 통해 “하나님과 로버츠 목사의 사역이 아니었다면 지금의 오순절 운동은 없을 것”이라며 그의 업적을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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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오~ 내사랑 목련화
글쓴이 : 목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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