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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운 전화번호부 책을 척척 통째로 다 외우고, 상자에서 쏟아진 수백 개의 이쑤시개 숫자를 순식간에 한치 오차도 없이 헤아릴 수 있으며, 순간적인 암산으로 큰 수를 곱하고 나누고, 망설임 없이 평방근(루트) 계산과 소수 계산을 하는가 하면, 나의 열한번째 생일은 무슨 요일이었는지, 열일곱이 되던 날의 날씨는 어땠는지 모두 기억하고 있다면?
정말로 놀랍고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대목 즈음이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영화 「레인맨」(1988)에서 더스틴 호프만의 열연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영화속의 주인공은 천재적인 세계의 석학이 아니라, 길 건너 수퍼마켓에서 파는 사탕 하나가 백원일지 만원일지 짐작조차 못하는 평생을 시설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폐증 장애인이지요.
‘서번트 증후군(Savant Syndrome)’은 이처럼 심각한 정신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특정 분야에서(주로 음악, 미술, 속셈, 날짜 계산, 기계수리 등) 장애와는 극도로 대비되는 천재적 재능을 보이는 현상을 말합니다. 정신의학계에서 공식적으로 통용되는 특정한 질환을 일컫는 말은 아니지만, 자폐성 장애 등에서 그러한 특성을 보일 때 ‘이디엇 서번트(Idiot Savant)’, 또는 ‘백치 천재’라 표현을 합니다. 'Savant'란 프랑스어 동사 ‘Savoir(알다)’에서 파생한 명사로 ‘학자' '석학’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최근 장나라가 주연한 영화 「하늘과 바다」도 이런 서번트 증후군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장나라가 열연한 하늘이는 24살의 젊은 처녀입니다. 그러나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까닭에 마음은 6살의 어린 소녀지요. 약간은 부족하지만 너무 특별한 하늘이 역시 몇 년 전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기억하는 것은 물론, 한번 본 숫자는 모두 외우고 한번 들은 곡도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숫자 감각과 천재적인 음악 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고양이 ‘비틀즈’와 바이올린과 대화를 나누며 집에서만 시간을 보내는 하늘이. 다행스럽게 하늘이에게 새로운 친구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들은 서로의 상처를 보듬으며 조금씩 아픔을 치료해 나갑니다.
서번트 증후군 현상들은 우리 뇌의 무궁무진한 비밀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그 기억회로를 탐구하고 이해하고 조정할 수만 있다면, 누구나 서번트들처럼 거대한 양의 기억을 뇌 속에 저장하고 맘껏 발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도 해보게 됩니다.
실제 진료실에서는 영화 「하늘과 바다」에서도 그러했듯이 하나의 사물에 대한 기억력이 뛰어난 자폐성 발달장애 아이들을 드물지 않게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러한 한두가지에서의 뛰어난 능력과 지식들을 사람들과 어울려 살아가는데 유용하게 접목시키지 못한다는 겁니다. 언어적으로 유창하고 지능도 좋은 자폐증(아스퍼거 증후군)의 경우에도 사회성 발달의 제한 때문에 자신의 뛰어난 언어 능력을 잘 발휘하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영화가 아닌 실생활에서 서번트를 앓고 있는 현실 속 하늘이는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아갑니다. 많은 일반인들이 그들에게 그릇된 편견을 가지고 있기도 하고, 때때로 그들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지나친 관심을 가지다가 금세 시들해지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그들의 능력이 성인기에 독립적인 직업 활동을 가질 수 있도록 연결되지 못합니다. 그 아이가 가지고 있는 사회성 발달 지연을 제대로 이해하고 쉽게 드러내지 않는 그들의 마음을 읽어주려는 노력이 부족한 것이죠.
그렇다면 하늘이처럼 행복한 서번트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서번트 증후군 환자들에게는 그룹 활동에서 자료 조사 등을 맡겨 친구들과 어울리게 돕기, 공룡과 같은 한 분야에 대한 관심을 이용하여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는 많은 다른 분야들로의 교육을 확장시키기, 관심 있는 분야를 이용하여 대화를 확장하고 상호작용을 증진시키기 등을 통한 사회성 교육이 필요합니다.
하루가 다르게 정확도와 속도의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는 컴퓨터와 IT문화 속에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나날이 보잘 것 없어져가는 듯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다고 해도 기계나 컴퓨터가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인간들만이 가지는 고유하고 소중한 능력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울고 있는 나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누군가의 따스함, 이 땅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지혜, 서번트 증후군을 앓고 있는 장애아라고 할지라도 그 능력이 보다 좋은 곳에 쓰 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일깨워주는 배려,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의 따뜻한 눈빛에서 비롯됩니다. 당신의 따스한 눈빛을 이들에게 보내주면 어떨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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