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야기

[스크랩] 법정스님과 이해인수녀-수녀의 추모글 외

어울령 2010. 3. 18. 13:16

며칠 전 법정 스님의 다비식을 TV로 보았습니다. 얼마 전 다녀 온 인도의 바리나시에서나 2008년 10월 카트만두에서 옥외 화장을 보던 생각이 나서 "화목을 너무 많이 쓴다. 네팔에서라면 10사람 분은 되겠다"라고 하면서도 그 분의 무소유의 삶이나 관도 없이 운구하고 화장하는 모습을 보며 참 깨끗한 분이 가셨다고 생각 했었는데 이 새벽 강대성군이 보내 온 글이 심금을 울려 이 곳에 올립니다. 스님의 극락 왕생을 빕니다.

 이해인 수녀의 추모글 

    법정스님께...

 

 길상사의 시민모임 ‘맑고향기롭게’가 11일 이해인 수녀가 보내온 법정(法頂)스님 추모글을 공개했다.
2008년 암 판정을 받은 이해인 수녀는
현재 부산 광안리 근처의 성 베네딕토 수녀원에서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다음은 이해인 수녀의 추모글 전문이다.

 

            


 

   

언제 한번 스님을 꼭 뵈어야겠다고 벼르는 사이 저도 많이 아프게 되었고 

스님도 많이 편찮으시다더니 기어이 이렇게 먼저 먼 길을 떠나셨네요.

2월 중순, 스님의 조카스님으로부터 스님께서 많이 야위셨다는 말씀을 듣고

제 슬픔은 한층 더 깊고 무거워졌더랬습니다. 평소에 스님을 직접 뵙진 못해도

스님의 청정한 글들을 통해 우리는 얼마나 큰 기쁨을 누렸는지요!


우리나라 온 국민이 다 스님의 글로 위로 받고 평화를 누리며 행복해했습니다.

웬만한 집에는 다 스님의 책이 꽂혀 있고 개인적 친분이 있는 분들은

스님의 글씨를 표구하여 걸어놓곤 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스님의 그 모습을 뵐 수 없음을, 새로운 글을 만날 수 없음을 슬퍼합니다.

'야단맞고 싶으면 언제라도 나에게 오라'고 하시던 스님.

스님의 표현대로 '현품대조'한 지 꽤나 오래되었다고 하시던 스님.

때로는 다정한 삼촌처럼, 때로는 엄격한 오라버님처럼 늘 제 곁에 가까이 계셨던 스님.

감정을 절제해야 하는 수행자라지만 이별의 인간적인 슬픔은 감당이 잘 안 되네요.

어떤 말로도 마음의 빛깔을 표현하기 힘드네요.


사실 그동안 여러 가지로 조심스러워 편지도 안 하고

뵐 수 있는 기회도 일부러 피하면서 살았던 저입니다.

아주 오래전 고 정채봉 님과의 TV 대담에서 스님은 '어느 산길에서 만난 한 수녀님'이

잠시 마음을 흔들던 젊은 시절이 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일이 있었지요.

전 그 시절 스님을 알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수녀님 아니냐며 항의 아닌 항의를 하는

불자들도 있었고 암튼 저로서는 억울한 오해를 더러 받았답니다.


1977년 여름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구름모음 그림책도 다시 들여다봅니다.

오래전 스님과 함께 광안리 바닷가에서 조가비를 줍던 기억도, 단감 20개를 사 들고

저의 언니 수녀님이 계신 가르멜수녀원을 방문했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어린왕자의 촌수로 따지면 우리는 친구입니다.

'민들레의 영토'를 읽으신 스님의 편지를 받은 그 이후 우리는 나이 차를 뛰어넘어

그저 물처럼 구름처럼 바람처럼 담백하고도 아름답고 정겨운 도반이었습니다.

주로 자연과 음악과 좋은 책에 대한 의견을 많이 나누는 벗이었습니다.


'…구름 수녀님 올해는 스님들이 많이 떠나는데 언젠가 내 차례도 올 것입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 때문에 겸허히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날그날 헛되이 살지 않으면 좋은 삶이 될 것입니다…

한밤중에 일어나(기침이 아니면 누가 이런 시각에 나를 깨워주겠어요) 벽에 기대어

얼음 풀린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이 자리가 곧 정토요 별천지임을

그때마다 고맙게 누립니다…'


2003년에 제게 주신 글을 다시 읽어봅니다.

어쩌다 산으로 새 우표를 보내 드리면 마음이 푸른 하늘처럼 부풀어 오른다며 즐거워하셨지요.

바다가 그립다고 하셨지요.

수녀의 조촐한 정성을 늘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미안하다고도 하셨습니다.

누군가 중간 역할을 잘못한 일로 제게 편지로 크게 역정을 내시어 저도 항의편지를 보냈더니

미안하다 하시며 그런 일을 통해 우리의 우정이 더 튼튼해지길 바란다고,

가까이 있으면 가볍게 안아주며 상처 받은 맘을 토닥이고 싶다고,

언제 같이 달맞이꽃 피는 모습을 보게 불일암에서 꼭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이젠 어디로 갈까요, 스님.

스님을 못 잊고 그리워하는 이들의 가슴속에 자비의 하얀 연꽃으로 피어나십시오.

부처님의 미소를 닮은 둥근달로 떠오르십시오.

 

  

  이해인 수녀의 추모 인터뷰

    스님을 말하다   
 

일보 조선 일보

                            

 

이해인 수녀는 법정 스님의 다비식이 치러지던 13일 경기도 의왕의 성라자로마을에 머물며

그 장면을 TV로 지켜보고 있었다.
지난 2008년 암 수술을 받은 이해인 수녀는 평소 부산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서
지내다 2~3개월에 한 번씩 상경해 검진을 받고 있다.
이해인 수녀는 "아흔 넘게 건강하게 사시며 세상에 좋은 글과 말씀을 전하시리라 믿었는데
너무 서둘러 가셨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비식이 치러지는 동안 이해인 수녀는 성라자로마을 부속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서
떠나는 스님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법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던 날은 오히려 실감이 안 나고 멍해졌어요.
그런데 송광사로 가신 스님의 법구가 정말로 관도 없이 평상에 누워서 떠나시는 다비 장면을 보고
있자니 그분의 부재가 갑자기 사무칩니다."

김수환 추기경의 선종 이후 수필가 장영희
교수, 그리고 법정 스님 까지국민적인 존경의 대상인
분들이 지난 한 해 사이 잇달아 세상을 떴습니다.
공교롭게도 수녀님과 각별한 인연을 쌓으신 분들이었습니다.
그분들을 떠나보내는 심정이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종교마다 죽음을 대하고 해석하는 시각이 다르니 각자 신앙의 가르침에 따라 받아들일 일이지만,
인간적으로는 참으로 슬프지 않을 수 없어요. 저도 투병 중이니 다음은 내 차례일까요?
그러나 허전함 못지않게 그분들과의 이별을 통해 깨달은 것도 적지 않아요.
추기경님은 스스로를 '바보'라고 낮추시며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쳐주셨어요.
절친한 친구였던 장영희 교수를 떠올리면 가슴이 저리면서도 그가 보여준 웃음과 씩씩했던 모습을
떠올리며 저도 씩씩하게 투병할 용기를 얻었어요.
관조차 마다하신 법정 스님은 생전에 '죽고 나면 빛이 바래니 살아생전에 나누며 살라'고 하셨다지요?
그 말씀을 곱씹으며 나는 남과 무엇을 나눌 수 있을까,
내가 그들에게 주지 않고 움켜쥔 것은 무엇인가 돌아보게 됐어요."

―법정 스님은 어떤 분이셨나요.

 
"자신의 수행에는 엄격했지만, 좋은 문장을 지닌 수필가였고, 가끔 유머감각을 보이실 때는
장난치기 좋아하는 소년 같기도 하셨죠. 제가 먹는 것을 좋아해 그분 보는 앞에서
좀 과식하는 모습을 보여드렸더니, 대뜸 '수행자는 많이 먹으면 안 된다'고 하셔서
'참 까다로운 분이구나'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편지로 '성베네딕도 규칙서'를 보내달라시기에
그리 해 드렸더니, '내 지령에 즉각 응답해 줘서 고맙소'라는 답장을 보내신 거예요.
'지령'이란 단어에서 장난기가 느껴져 웃고 말았죠. 산에 사셔서 새의 이름을 많이 아시던 스님은
'수녀님은 뻐꾸기밖에 모르시지요?'라는 짓궂은 질문으로 나를 놀리신 적도 있어요."

―법정 스님의 첫인상은 어떠셨습니까.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낸 뒤 친구 권유로 시집과 편지를
스님이 계신 송광사 불일암에 보내드렸습니다.
스님께서 곧바로 고맙다는 답장을 보내주신 것이 우리 인연의 시작이었지요.
스님의 평소 인상은 지적이고 딱딱해 보이지만 언뜻언뜻 비치는 속내는 다정하신 면도 있고,
남을 돕고 싶어 하는 마음도 크셨어요. 그걸 말로 앞세우거나 겉으로 드러내면 자기자랑으로 비칠까
스스로 경계하고 조심하시며 사신 것이라 생각됩니다."

―법정 스님이 수녀님 계신 부산 성베네딕도 수녀원을 방문하셨고, 함께 광안리 해변도 걸으셨다지요.
쑥스럽거나 어색하지는 않으셨습니까.

"제가 먼저 걷자고 했어요. 단둘이 걸었는데…. 그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지 않은 것이 아쉬워요.
스님께서 그날의 해변 데이트를 밥과 국에 비유하신 게 지금도 생각나요.
'내내 산만 바라보며 살면 국 없는 밥을 먹는 느낌인데, 이렇게 바다에 와 보니
밥그릇 옆에 국그릇도 있는 것 같아 좋다'고 하셨어요. 1978년쯤이니까 스님은 그때 40대였고,
저는 30대 초반이었는데, 스님이나 저나 약간 긴장했던 것 같기도 해요.
제가 불일암으로 찾아뵈었을 때는 둘이 함께 있는 걸 아주 멋쩍어하셨어요.
앞에 놓인 포도를 드시는데, 말도 없이 어찌나 빨리 드시는지 화나신 것 같더라니까요.
불일암을 떠날 때도 여자인 저를 순천역으로 배웅해야겠는데 그러자니 어색하고 해서
난감해하시는 게 표정으로 다 보이더라고요."

―법정 스님과 김수환 추기경님, 수녀님은 종교를 초월해 교유하셨지요.
빈부와 지역·이념으로 찢긴 우리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적지 않아 보입니다.

"길상사의 '맑고 향기롭게' 모임 10주년 때 제가 기념 축시(祝詩)를 썼어요.
길상사에서 2005년 열린 음악회에는 추기경님과 제가 초대받았습니다.
스님은 명동성당에서 강연도 하셨잖아요? 저는 스님을 찾아가면 '공양 주세요' 했고,
스님이 저를 찾으시면 '성찬을 들자'며 서로 상대 종교의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김 추기경님과 법정 스님은 자신의 종교와 신념을 유지하면서도
남의 믿음을 포용하는 세상이 되기를 바라셨을 거라 생각됩니다.
우리 사회가 그분들의 뜻을 깊이 새겼으면 합니다."

―만남을 통해 파악하신 두 분의 성격은 어떠했나요.

"김 추기경님이 가지를 넓게 펴고 세상을 품는 느티나무였다면,
법정 스님은 늘 푸르름을 잃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는 소나무라 할 수 있지요."
 
―수녀님과 법정 스님은 각각 시와 산문으로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은 문인이기도 합니다.
동료 문인으로서 스님의 글이 지닌 특징을 어떻게 보시나요.

"글로는 '어린 왕자에게 보내는 편지'로 처음 만났지요. 글이 원래 그 사람 자체라고 하는데,
스님의 글은 따뜻하고 인간적이면서도 문체는 무르지 않고 깔끔하기 그지없어
딱 스님의 성격 그대로더군요. 제가 시인이니까 시인의 언어로 표현해 보자면 스님의 글은
'눈 쌓인 산기슭에 서 있는 소나무'입니다.
스님께서 투병하시며 '맑고 향기롭게' 회지(會誌)에 쓰신 글도 제 마음에 남아 있습니다.
'사람이 아프게 되면 그 사람만 아픈 게 아니라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친분의 농도만큼
같이 앓게 된다'는 내용이었어요. 평소 우리가 어렴풋이 느끼고 있는 것을 스님은 적절한 언어와
인간의 본질을 꿰뚫는 시선으로 표현하셨어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스님의 글을 사랑하고,
그 글과 어울리는 그분의 인간적 성품을 사랑한 것 아닐까요."

―법정 스님의 산문집 '무소유'에는 스님이 아끼던 난(蘭) 화분을 잃어버린 것을 계기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는 무소유의 가치를 깨닫는 얘기가 나옵니다. 수녀님에게도 법정 스님의
난 화분 같은 집착의 대상이 있었습니까.

"저희 수녀들도 평생 소유하지 않고 살겠다는 '청빈서원'을 합니다.
저는 자가용은 물론 카드도 한 장 없어요. 아무리 제 시집과 산문이 잘 팔려도
그 돈은 저 혼자 쓰는 돈이 아닙니다. 심지어 명예조차도 소유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이
수녀가 지향하는 청빈의 삶입니다."

―명예도 소유하고 싶은 가치라는 점에서 법정 스님의 마음을 한때 사로잡았던
난과 다를 게 없다는 말씀이시군요.

"명예욕이 뭡니까. 명예를 향한 '욕심'이잖아요.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마음속의 욕심도 버려야지요.
그래서 베풀 때도 '이해인' 개인이 아니라 제가 속한 단체 이름으로 합니다.
그 베푸는 행위가 내가 평소 더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에 집중되어서도 안 됩니다.
그러니까 명예욕만 버려서는 안 되고 관계를 독점하거나 특정한 관계를
좀 더 정성스럽게 가꾸거나 유지하려는 욕심까지도 버려야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한 사람만을 편애하지 않으시고 골고루 사랑을 나누어 주신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수녀가 지향할 무소유의 삶이라 할 수 있지요."

―수녀님은 추도시를 많이 쓰시는 편입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을 때 봉헌한 시에는 '스스로를 서슴없이 바보라고 말했던
현자(賢者)'라고 하셨고, 장영희 교수에게는 '하늘나라에서도 우리 꼭 한 반 하자'고 하셨죠.
일부에서는 수녀님이 추도시를 너무 많이 쓰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있습니다.

"가신 분들과 평소 쌓았던 친분을 바탕으로
작은 선물을 드리고 싶은 마음으로 추도시를 씁니다.
그런데 그런 시를 쓰면 삶의 유한성을 묵상하며 마음이 정리되고 제 마지막을 준비하는
성찰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꼭 인연 있는 분들을 위해서만 추도시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
대구지하철 방화 사건, 중국 민항기 추락사고, 태풍 매미로 인해 희생당한 분들처럼
저와 친분이 없는 분들을 위해서도 추도시를 썼어요."

―수녀님도 2008년 7월 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그해는 종신서원 4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였는데 힘든 일이 겹치고 말았더군요.
수술 후 경과는 어떠하신지요.

"그해 5월 23일 수녀 동기 11명과 서원 40주년을 맞았는데 두 달 후 수술을 하느라
함께 여행을 가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어요. 그런데 병 걸린 나를 지극정성 간호해 주는
동기 수녀들의 사랑을 확인하고 아픈 중에도 행복했어요.
지난 1월 발표한 산문집 '희망은 깨어있네'에 투병에 임하는 심정을 밝혔듯이

저는 '명랑투병'을 할 겁니다. '오늘 하루가 내 모든 생애'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해 살 뿐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추모시

 

3월의 바람속에

 

                                       





차갑고도 따뜻한 봄눈이 좋아


3월의 눈꽃속에 정토로 떠나신 스님


'난 성미가 급한 편이야' 하시더니


꽃피는 것도 보지 않고 서둘러 가셨네요



마지막으로 누우실 조그만 집도 마다하시고


스님의 혼이 담긴 책들까지 절판을 하라시며


아직 보내 드릴 준비가 덜 된 우리 곁을


냉정하게 떠나신 야속한 스님



탐욕으로 가득 찬 세상을 정화시키려


활활 따는 불길 속으로 들어가셨나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중생들을 깨우치시고자


타고 타서 한 줌의 재가 되신 것인가요



스님의 당부처럼 스님을 못 놓아 드리는


쓰라린 그리움을 어찌할까요


타지 않은 깊은 슬픔 어찌할까요



많이 사랑한 이별의 슬픔이 낳아준 눈물은


갈수록 맑고 영롱한 사리가 되고


스님을 향한 사람들의 존경은 환희심 가득한


자비의 선행으로 더 넓게 이어질 것입니다



종파를 초월한 끝없는 기도는 연꽃으로 피어나고


하늘까지 닿는 평화의 팁이 될 것입니다



하얀 연기 속에 침묵으로 잔기침하시는 스님


소나무 같으신 삶과 지헤의 가르침들 고맙습니다


청정한 삶 가꾸라고 우리를 재촉하시며


3월의 바람 속에 길 떠나신 스님,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라도 3월의 바람으로 다시 오십시오.


우리에게.


  

 

 이해인 수녀의 추모 인터뷰

            스님을 말하다  

                          

 

 중앙일보 

 

2010.03.12 03:01 입력 / 2010.03.12 11:08 수정

‘중이 수녀 찾아간다는 게 왠지 쑥스러웁디다’ 며 웃던 그분 …

“구름 수녀님!” 이제 자유의 몸으로 돌아간 법정 스님은 평소 이해인(65·사진) 수녀를 이렇게 불렀다.

이 수녀의 세례명이 ‘클라우디아’이기 때문이다.

스님은 ‘클라우디아’에서 영어 단어 ‘클라우드(Cloud·구름)’를 떠올렸다.

그만큼 법정 스님과 이해인 수녀의 친분은 두텁다. 출가자로서, 작가로서, 수도자로서 공유점이 적지 않다.

법정 스님은 불교계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고, 이 수녀는 ‘가톨릭의 가장 대중적인 아이콘’이다.

그래서 이해인 수녀에게 법정 스님의 추모 인터뷰를 청했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1976년에 출간됐죠. 어디서 어떻게 읽으셨나요.

“76년은 제가 종신서원을 했던 해죠. 책이 나온 지 얼마 안 돼 금방 읽었어요.

당시 너도 나도 그 책을 읽으려고 했던 기억이 새롭네요.”


-읽고 나서 소감은요.

“저 역시 수도자 신분이다 보니 내용들이 다 맘에 와 닿았죠.

책의 ‘난(蘭) 화분’ 이야기를 읽고 개인적으로 집착하기 쉬운 취미는 안 가지게 된 것 같아요.”


-법정 스님과 언제 처음 만나셨나요.

“국어교사였던 제 친구가 송광사 불일암의 주소를 줬어요.

제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꼭 한 권 보내라고 권하더군요.

책과 함께 편지를 드렸는데 즉시 답신이 왔어요.

그리고 78년쯤 부산 광안리의 우리 수녀원(성베네딕도 수녀원)을 방문하셨어요.

그 뒤에 수녀원에 하루 묵어가신 적도 있고요.”


-기억나는 풍경이 있으세요.

“수녀원에 오셨을 때 제가 광안리 바닷가를 함께 걷자고 했죠.

순순히 따라 주셨어요. 제가 주웠던 조가비를 드리니 주머니에 넣으셨어요.

비구 스님과 수녀가 바닷가를 걷자니 좀 쑥스러우셨던 것 같아요.

그 뒤에 불일암에서 어느 보살님과 제가 하루를 묵은 적이 있어요.

보살님은 아침 일찍 출근해야 한다고 저를 순천까지 데려다 주시라고 부탁하고 갔어요.

몇 시간 적막한 산중에서 스님과 단둘이 있으려니 어색했죠.

스님도 계속 헛기침을 하시며 절더러 포도를 씻어오라 하시더니

마치 성난 사람처럼 집어 드시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아마 그 시절엔 스님도, 저도 젊었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부산엔 종종 오셨나요.

“부산에 자주 오시라고 하면 ‘거 참 중이 수녀 보겠다고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왠지 쑥스러웁디다’라며 너털웃음을 짓곤 하셨죠.

자주 뵙진 못해도 늘 든든한 버팀목 같은 분이셨어요.”


-법정 스님은 김수환 추기경과도 친분이 무척 두터우셨죠.

김 추기경 선종 1년여 만에 법정 스님도 입적하셨어요.


“정말 슬픕니다. 성당에 앉아 있는데 눈물이 나더군요.

86년도 쯤인가…, 제가 유명세 때문에 괴로워할 적에도 법정 스님은

제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어요. 오늘은 스님께서 제게 보내주신

피카소의 ‘전쟁과 평화’란 그림엽서를 한참 들여다 봤어요.”


-‘시인 이해인’이 보는 ‘수필가 법정’은 어떠합니까.

“그 분의 글은 한마디로 시원한 동김치(동치미) 같아요. 읽을수록 감칠 맛이 납니다.

‘같은 표현이라도 어쩜 이렇게 하실까?’하고 감탄할 적이 많죠.

개인적으로 저는 『영혼의 모음』과 『서있는 사람들』을 좋아합니다.”


-‘수도자 이해인’이 보는 ‘수행자 법정’은 어떤가요.

“어찌 보면 좀 냉정하리만치 철두철미한 분으로 여겨졌어요.

그러나 실은 속정이 많은 분이셨죠. 타 종교를 이해하는 폭도 넓으시고,

늘 책을 가까이하며 진리를 탐구하는 구도자의 모습이셨죠.”

           

-법정 스님 하면 ‘무소유’가 떠오릅니다.

그리스도교 영성에서도 ‘무소유의 영성’은 각별한 의미가 있지 않나요.


“‘무소유’는 말로 강조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무소유는 어디에도 매이지 않는 자유인이 되었을 적에야

비로소 가능한 경지인 것 같습니다. 진정한 겸손과 사랑이 없는 무소유는

공허할 뿐이죠. 때론 훌륭한 일을 하면서도 영적 우월감에 빠질 수 있고,

때론 자기 방식의 무소유를 강조하며 남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죠.

이 길은 참으로 큰 숙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법정 스님 위중 소식을 듣고 성당에서 기도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저뿐 아니라 스님을 아는 다른 수녀님들도 같이 기도를 했을 겁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잘 선종(열반)하실 수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법정 스님은 장례식도 하지 말고, 다비만 조촐히 하라고 유언을 남겼습니다.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대단하시다’는 말밖에 안 나오네요. 여러 사람에게 폐 안 끼치고,

번거로운 절차를 피하고, 극히 단순하게 하라는 메시지를 남기신 거잖아요.

당신의 평소 성격 그대로의 유언으로 여겨집니다.”


-마지막으로 이 거대한 자연의 품으로, 생명의 품으로 돌아가신 법정 스님께

수녀님께서 보내시는 작별인사를 듣고 싶습니다.


“스님께선 이젠 정말로 스님의 본래 뜻대로 완전한 무소유가 되셨네요.

스님께서 그리고 꿈꾸시던 정토에서 부디 행복하세요.

스님께서 그토록 좋아하셨던 ‘어린 왕자’처럼 별나라에 가시거든 종종 꿈에라도

잠시 오시어 더 아름답게 사랑하는 법을, 길들이는 법을 일러주세요.

길들인 것과의 이별이 쉽지 않은 우리에게 잘 이별하는 법도 가르쳐 주세요.”


글,사진=백성호 기자 
 

 
 
출처 : 따뜻한 봄 양지녁
글쓴이 : 봄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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