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선생의 글을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젊음은 물음표와 느낌표 사이에서 매일 죽고 매일 태어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젊은이라면 물어야 할 것이 있고, 느껴야 할 것이 있다는 소리이지요.
저는 그 말을 되새기면서 이렇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젊게 살려면 한편에서는 물어야 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느껴야 한다고요.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어렸을 때 얼마나 많은 질문을 하면서 컸지요?
부모에게, 어른에게 끊임없이 ‘이게 뭐야?’‘저게 왜 저래?’라고 묻지 않았던가요.
아마 꼬치꼬치 캐묻다가 귀찮다고 나무라는 소리도 꽤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물어보는 습성은 이상하게도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슬그머니 사라지고 맙니다.
학교에서는 묻는 것은 선생님 몫이고 아이들은 대답해야 합니다. 시험이란 것이 바로 그런 것 아닌가요. 시험에 주눅이 든 뒤부터 아이들은 더 이상 질문하기를 꺼려하게 됩니다. 물음을 영어로는 question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라틴어‘Quaestio’에서 왔습니다.
질문이 있을 때마다 문장 끝에 일일이 이말을 쓰다 보니 번거로웠습니다. 그래서 머리글자의 Q와 꼬리글자의 o를 따서 ‘Qo'라고 표시했다는 겁니다. 그러다가 Q자 아래 o자를 붙여 쓰게 되었는데, 물음이 잦다보니 그마저 줄어들고 바뀌어 오늘과 같은 물음표가 되었다고 하네요.
물어보세요.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에 물음표를 달아 보세요.
젊음이 시작될 것입니다. 물음표와 짝을 이루는 기호는 느낌표입니다.
느낌표는 ‘와’하는 감탄사를 기호로 표시한 결과입니다. 라틴어의 ‘Io'는 ’와‘하는 의성어입니다. 물음표만 던지다 보면 끊임없이 주저하며 머뭇거리게 됩니다. 느낌표가 있어야 느끼고(感) 움직이게(動) 됩니다.
아니, 느껴야 비로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물음표가 자동차의 브레이크라면, 느낌표는 가속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은 사람은 누구나 물음표와 느낌표를 동시에 갖고 살아야 된다고 말씀합니다.
물음표는 느낌표가 있기에, 느낌표는 물음표가 있기에 작기 자기 특성을 드러낼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묻기만 하고 만다면, 결코 움직임이 없습니다. 늘 느끼기만 한다면, 결코 개혁이 없습니다.
물음표는 머리로 따집니다. 느낌표는 가슴으로 경험합니다. 물음표와 느낌표를 떨어져 있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젊게 사는 방식입니다.
어디 젊게 사는 것에만 물음 느낌표가 필요할까요? 우리의 신앙생활에서야 말로 물음 느낌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나아가는 실천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참 맛 아니겠어요!...
- 감신대 교수 왕대일 목사의 글에서 -
[원문 인용] 이어령 "젊음의 탄생"
* 왕대일 목사는 한국구약학 회장직을 맡고있으며 새바람 지역사회 공동체를 섬기는 대표 목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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